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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문헌 목록 〉21. 21世 〉37. <부정공>학생공휘창규묘표(學生公諱彰奎墓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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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부정공>풍촌공휘규현(대현)행장(楓村公諱奎鉉(大鉉)行狀)
楓村公諱奎鉉(大鉉)行狀 公諱奎鉉字亨執楓村其號也我趙氏以高麗侍中諱璋爲初祖三傳諱元吉號農隱與圃牧陶治幷稱五隱是生諱瑜號虔谷麗季守罔僕義不受 我朝徵命生諱崇文號竹村與其子哲山幷爲 端廟忠臣此五世以上也其後累傳而有諱復夏 贈通訓大夫司僕正諱基泰 贈通訓右丞旨諱鎭七 贈嘉善工曹參議諱昌孝寝郎進司憲府監察階嘉善同中樞寔高曾祖禰四世也妣貞夫人礪山宋氏永玉女繼妣金海金氏衡河女府君宋氏出也以癸未二月二十四日生府君于楓橋里舊第纔三歲慈母見背幸有一婢乳道賴以無恙天性寬柔誠謹六七歲屹如成人無一言或咈親意事繼慈孝應唯愉惋晨昏定省過異味不敢先入口必進父母嘗之而後乃食才成童感被育之情禀請大人贖良厥婢永給田土使得其所或至親怒捽髮亂杖毫無顯色只匐膝行起敬起孝以竢息怒與弟友于食必同卓寝必同被析著分炊治屋分土一如薛包古事或有過誤諄諄敎喻必期感悟未嘗以咈言勵色以失和常以不記慈願爲恨繼慈二年有疾百方醫治厠㢏澣滌不委於人疴痒抑搔出入扶持及遭憂攀號屢絶附身附棺尤極豊厚後丁外艱亦如前喪誠子姪曰吾自幼幹家未曾讀書悔莫及焉汝曺憫我勤勤讀書期乎立揚不墜家聲既己鄉人欲擧其行於道繡者屢矣府君聞而駭然曰吾無過人之行欲此誤擧是重吾過也力止不己及寝之可見其雅意之所存耳辛巳三月十六日卒于寝葬于住洞之寺谷艮坐原輓誄致哀者數百餘人配濟州梁氏鍾敎女配德無違鄉坊稱以女士生五男淵玉淵立淵生淵石淵韓孫曾不錄自世敎衰民不與行謀利蔑倫擧世滔滔而惟吾府君之懿行實德非小子之所敢窺測而恐其愈久而愈失其眞畧擧家庭聞見之一二以請于世之立言君子 不肖子 淵生 泣血謹識 풍촌공휘규현행장(楓村公諱奎鉉行狀) 공의 휘는 규현이요 자는 형집(亨執)이며 풍춘은 그 호이다. 우리 조씨는 고려대장군 장(璋)을 상조로 三전하여 휘 원길(元吉)의 호는 농은인데 포·목·도·야(圃牧陶冶)로 더불어 오은이라 칭하였고, 생휘 유(瑜)의 호는 건곡인데 고려말에 망복 의리를 지켜 이조의 부름을 받지 아니하였으며, 생휘 숭문(崇文)의 호는 죽촌인데 그아들 철산(哲山)과 더불어 단묘 충신이 되었으니 이 선조가 五세 이상 이었다. 그 뒤에 여러번 전하여 휘 복하(復夏)는 증 통훈대부 사복시정이요 휘 기태(基泰)는 증통훈 우승지며 휘 진칠(鎭七)은 증 가선 공조참의요 휘 창효(昌孝)는 침랑으로 사헌부 감찰에 진계하여 가선 동중추로 여기까지 곧 고·증·조·니 四세였다. 비는 정부인(貞夫人) 여산송씨(礪山宋氏) 영옥(永玉)의 녀요 계비(繼妣)는 김해김씨(金海金氏) 형하(衡河)의 녀로, 공은 송씨가 낳은 아들이었다. 계미(癸未) 二월二十四일에 공을 풍교리 옛집에서 낳았는데, 겨우 세살에 모친이 세상을 떠났으나 다행이 한 계집종의 유도가 있어 공을 부양하였다. 천성이 너그럽고 성근하여 六·七세에 의연히 성인 같고 단 한가지 말이라도 어버이 뜻을 거스린 일이 없으며 계모를 섬기며 기꺼이 응대하고 아침 저녁으로 문안하며 별미를 만나면 반드시 부모에 먼저 드리여 부모가 먼저 잡수신 뒤에야 먹었다. 겨우 성동(成童)이 됨에 양육의 정에 감동하여 어버이께 품고하고 그 계집종을 속량하여 논밭을 주어 살 곳에 마련하게 하였다. 혹 어버이가 성내어 머리를 잡고 매를 쳐도 조금도 안색에 노기를 나타내지 않고 공경하고 효도하여 성난 빛이 가라 안도록 기다리었다. 아우와 더불어 우애하여 반드시 탁자를 같이하여 먹고 반드시 이불을 함께 덥고 자며 분재할 때 집과 땅을 한결같이 설포고사(薛包古事)같이 하고 혹 과오가 있으면 거듭 거듭 가르쳐 반드시 깨달으게 하며 일찍 나쁜 말과 모진 안색으로서 화기를 잃지 아니하였다. 항상 자친을 보지 못한 것으로 천추의 한을 삼아, 계모가 二년간 병석에 누웠는데 백방으로 의원을 불러 치료하고 대소변 세탁을 다른 사람에게 맡기지 아니하며 가려운 곳 긁어드리는 것과 출입할 때 부축하는 것을 일일이 몸소 하였다. 상사를 당함에 휘여잡고 부르짖으며 자지러지다가 몸에 부디치며 관에 의지하고 더욱 풍후하게 하고 뒤에 외간에도 또 이와 같이 하였다. 자질을 훈계하여 말하되, 『내가 어려서부터 살림하다가 글을 못 읽어 후회막급이니 너의 무리는 나를 측은이 생각하여 부지런히 글을 읽어 입신양명 할지어다.』 이윽고 고을 사람이 그 행실을 도백에게 자주 거문 하고저 하였는지라. 공이 듣고 놀래어 말하기를, 『내가 다른 사람보다 나은 행의가 없는데 이와 같은 행사는 나의 과실을 더하는 일이다.』 하고 힘써 중지하게 하였다. 신사(辛巳)년 三월 十六일에 정침에서 졸하여 주동의 절골 간좌원(住洞之寺谷艮坐原)에 장사하니 만장을 가지고 슬피 조상한자 수백인이었다. 부인은 제주양씨(濟州梁氏) 종교(鍾敎)의 따님으로 짝한 덕이 어김이 없어 고을 사람이 모두 여사(女士)라 칭송하였다. 아들은 연옥(淵玉)·연립(淵立)·연생(淵生)·연석(淵石)·연한(淵韓)이요, 손자 증손은 기록 아니한다. 세교가 쇠퇴함으로부터 윤강이 해이하고 이익을 탐하여 천륜을 불고한자 성행한데, 오직 우리 공의 아름다운 행실과 진실한 덕은 소자의 감히 칭양할바 아니나, 더욱 오래되면 그 참됨을 잃어버릴까 두려워하여 대략 가정에서 들고 본 한두가지를 들어 세상에 말을 바로하는 군자에게 청함. 불초자(不肖子) 연생(淵生) 락루(落淚)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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